사이 문과 여백(餘白)
"도둑은 잡지 말고 쫓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행 록에도 "남과 원수를 맺게 되면 어느 때 화를 입게 될지 모른다."라고 했고,
제갈공명도 죽으면서
"적을 너무 악랄하게 죽여 내가 천벌을 받는구나..."라고 후회하며,
"적도 퇴로를 열어주며 몰아붙여야 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집에는 대문이 있고 뒤쪽이나 옆 모퉁이에 사이 문이 있는
집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에도 뒤뜰 장독대 옆에 작은 사이 문이 하나 있어서 이곳을
통해 대 밭 사이로 난 지름길로 작은 집에 갈 수 있어서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이 사이 문은 누나들이나 어머니가 마실을 가거나 곗방에 갈 때, 그러니까 어른들
몰래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어른들의 배려였는지도 모릅니다.
옛날 어른들은 알면서도 눈감아 주고 속아준 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여유"이고 "아량"일 것입니다.
제가 열세 살 때의 일입니다.
황금물결 넘실거리던 가을 들녘은 추수가 끝나자 삭막하였지만 넓은 마당은
다니기도 어려울 만큼 나락 베눌(낟가리)로 꽉 차 있었습니다.
하늘 높이 쌓아 놓은 나락 베눌은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도 흐뭇했는데 여름 내내
땀 흘리며 고생하셨던 어른께서는 더욱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습니다.
늦가을 어느 날 타작을 하며 나락을 마당에 쌓아 놓고 가마니로 덮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수선한 소리에 나가보니 거위 한 마리가 목이 잘린 채 대문 앞에
죽어 있었습니다. 원래 암놈 거위는 목소리가 크고 맑아 소리를 쳐서 엄포를
놓거나 주인에게 구호 요청을 하고 수 놈 거위는 허스키한 목소리를 내며 괙괙
소리를 지릅니다. 목을 길게 빼고는 날개를 치면서 덤벼들어 물어뜯는 고약한
성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서 우리 집에는 얼씬도
못했습니다. 웬만한 개보다도 사나워 집 지키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그 무렵은 식량이 귀하던 때라 도둑이 많아 개나 거위를 키우는 집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 밤에 도둑이 든 것입니다. 거위가 도둑놈의 바짓가랑이를
물자 낫으로 목을 후려쳐 죽이고 나락을 퍼 담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그날 밤은 초 겨울 날씨로 바람이 몹시 불고 추웠습니다.
마침 싸락 눈이 내려 발자국이 눈 위에 선연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라 강아지 마냥 종종걸음으로 쫓아갔습니다.
발자국은 고샅(마을의 좁은 길)을 지나 맨꼭대기 오두막집으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서 발자국을 지우며 내려오시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아버지는 호랑이같이 무섭고 급한 성격이라 당장 문을 차고 들어가 도둑의
덜미를 잡고 끌어내서 눈밭에 팽개치거나, 동네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말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아니면 경찰서로 끌고 가서 곤욕을 치르게
하거나 형무소에 보냈음직한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뒷짐을 지고 돌아오셨습니다.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이런 짓을 했을라고..."
어린 소견이었지만 여름 내내 불볕더위 속에서 땀 흘리며 농사지어 탈곡해 놓은
나락을 훔쳐간 도둑을 당장 요절이라도 냈어야 평소 아버지 다운 위엄이 설 것
같았습니다.
저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아버지의 깊은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여유"이고 "지혜"라는 것을!
"도둑은 잡지 말고 쫓으라."는 말씀도 함께...
그날 이후 H 씨는 평생토록 원망과 원한 대신에 나락 한 가마니 빚을 지고
아버지에게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우리 집에서 살다시피 하며 궂은일도
마다치 않고 도맡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일은 꼭 생각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치나 원칙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
남의 사소한 실수 같은 것을 덮어주지 못하고 몰아세우고 따지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라. 사람을 비난할 때도 상대방이 변명할 수 없도록 무차별 공격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상대방이 달아날 구멍을 항상 조금은 남겨 놓아라..."
현대를 사는 우리도 "사이 문"과 "여백"의 아름다움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동양화에서 여백은 무한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여백은 보는 이의 몫으로 구름, 새, 꽃, 나아가 보이지 않는 바람까지도
그려 넣을 수 있는 "여유의 공간" 입니다.
우리는 수묵화의 넉넉함과 아름다움을 즐기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비우는
데는 인색합니다. 항상 위만 쳐다보고 달려가다 보니 고달프기도 하고 외롭습니다.
"적정한 소유가 마음의 평안을 주고 여유를 가진 삶이 풍요를 누린다."는 진리를
우리는 대부분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너무 완벽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은
타인이 접근하기가 부담스럽고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공자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남의 옳고 그른 것을
계속 살피다 보면 친구가 남아 있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약간 엉성하고 빈 틈이 있어야 함께 어우러지기도 하고 서로 동화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돈을 귀히 여기는 자는 재물을 가지나, 사람을 귀히 여기는 자는 천하를 얻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도 귀한 사람과 주위에서 존경받는 오늘이 되시기 바랍니다.